
✏️ 드로잉 취미, 미술 전공 아니어도 매일 그릴 수 있는 이유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림이랑 꽤 오래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선생님이 제 스케치북을 보시더니 “이 사과가 사과야?”라고 하셨던 그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 뒤로 저는 스스로를 ‘그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그냥 조용히,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카테고리를 제 삶에서 지워버린 거죠.
근데 막상 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계기는 아주 사소했습니다. 작년 가을,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딱히 뭘 할 기운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자기엔 뭔가 허전한 그런 밤이었습니다. 우연히 SNS에서 누군가의 드로잉 계정을 봤는데, 정말 간단한 선 몇 개로 오늘 먹은 밥을 그린 거였어요. 완성도 같은 거 없었습니다. 그냥 따뜻했습니다. ‘나도 저거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날 밤 서랍 속에 잠자던 0.5mm 볼펜과 다이어리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드로잉 취미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글은 그 경험을 솔직하게, 좋았던 것도 아쉬웠던 것도 함께 나눠보고 싶어서 씁니다. 미술 전공도 아니고, 재능도 평범한 38세 직장인의 드로잉 이야기입니다.
🎨 드로잉 취미란 무엇인가요? — 미술과 드로잉은 다릅니다
많은 분들이 드로잉이라고 하면 ‘미술’을 떠올리십니다. 화방에 가서 캔버스 사고, 물감 짜고, 뭔가 거창한 작품을 완성하는 것.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주눅이 들었죠.
근데 드로잉은 조금 다릅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이 취미를 통해 이해한 드로잉은 ‘선과 형태로 일상을 기록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오늘 마신 커피잔, 출근길에 본 은행나무, 퇴근 후 식탁 위에 놓인 반찬 그릇 하나. 이런 것들을 손으로 담아내는 일이에요. 완성도보다 기록에 집중하는 거죠.
미술은 기술과 이론이 중요하고,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드로잉 취미는 조금 더 느슨하고 자유롭습니다. 자기 눈에 예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틀린 그림이 없습니다. 그 점이 저한테는 정말 중요했습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림일기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어릴 때 방학숙제로 하던 그 그림일기 말고요. 요즘엔 어른들이 하루의 한 장면을 간단하게 스케치하고 짧은 글을 곁들이는 형태의 드로잉 일기가 꽤 많은 분들 사이에서 퍼져 있습니다. 저도 그 영향을 받았고, 지금은 그게 제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한 의식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 미술 전공 없이도 매일 그릴 수 있는 진짜 이유들
① 도구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
처음 시작할 때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좋은 도구가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한동안 그랬어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된 스케치북이랑 수채화 물감 사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근데 사실 저는 첫 드로잉을 다이어리에 볼펜으로 했습니다. 그게 더 좋았어요. 어차피 볼펜이니까 지울 수도 없고,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이 없었거든요.
매일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건 의외로 정말 간단합니다. 종이 한 장과 펜 하나면 됩니다. 물론 나중에 취향이 생기면 좋아하는 스케치북을 고르고, 컬러링 펜이나 색연필을 하나씩 추가하는 재미가 생깁니다. 저는 지금 작은 A6 사이즈 스케치북과 미크론 펜 두 자루, 그리고 색을 넣고 싶을 때는 색연필 몇 가지를 쓰는 정도입니다. 가방 속에 다 들어갑니다. 점심시간에 카페에서도 꺼낼 수 있을 만큼 가볍습니다.
비싼 도구를 갖추는 건 오히려 나중 이야기입니다. 매일 그리는 습관이 먼저입니다. 도구는 습관이 생긴 뒤에 천천히 늘려가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② ‘잘 그려야 한다’는 기준을 버리는 순간 매일이 가능해집니다 🌿
제가 드로잉을 지속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이겁니다. 잘 그릴 필요가 없다고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
처음엔 그게 잘 안 됐습니다. 그릴 때마다 ‘이거 비율이 이상하다’, ‘선이 삐뚤어졌다’ 하고 신경이 쓰였거든요. 그러다 보면 그리는 시간보다 지우개질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결국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냥 패스’로 끝나는 날이 늘어납니다. 저는 초반에 딱 그 패턴에 빠졌었어요.
전환이 생긴 건 드로잉 일기를 올리는 계정들을 유심히 보다가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팔로워가 많은 계정들 중에 그림이 “예쁜” 것도 있지만, 그림이 다소 투박해도 그날의 감정과 기록이 살아있는 계정들이 훨씬 더 사람 마음을 움직이더라고요. 아, 그렇구나. 드로잉은 ‘완성도’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담는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그 뒤로는 그냥 그렸습니다. 삐뚤어도. 비율이 이상해도. 제 눈에 그날 봤던 그게 담겨 있으면 됐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빠지는 날이 확 줄었습니다.
③ 하루 10분이면 충분합니다 — 드로잉은 짧아도 됩니다 ⏱️
직장 다니면서 취미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직장인이라면 다들 아실 거예요. 저도 야근이 잦은 편이라, 퇴근하면 뭘 할 기운이 없는 날이 꽤 많습니다. 그런데 드로잉은 그나마 제가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짧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거창한 작품을 그리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림일기처럼 일상의 한 장면을 간단히 기록하는 드로잉은 10분, 15분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점심시간에 먹은 음식을 간단히 스케치하거나, 자기 전에 오늘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를 빠르게 그리는 식으로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어느 드로잉 작가가 인터뷰에서 “5분도 충분하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엔 ‘5분에 뭘 그리냐’고 생각했는데, 직접 해보니까 5분도 꽤 많은 걸 담을 수 있더라고요. 중요한 건 완성도가 아니라 그 5분을 매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완벽한 그림 하나보다 허술한 그림 서른 장이 더 소중합니다. 적어도 저한테는요. 서른 장을 펼쳐보면 지난 한 달이 그 안에 있거든요.
④ 그리다 보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
이 부분은 시작하기 전엔 전혀 예상 못 했던 변화입니다. 드로잉을 꾸준히 하다 보면,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늘 뭘 그릴까 생각하다 보면, 별거 아닌 것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전봇대의 선들. 퇴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꽃집 앞 화분. 점심 식사 후 테이블에 놓인 물컵의 빛. 예전엔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 ‘그릴 수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처음엔 작은 변화 같았는데, 쌓이고 나니 꽤 큰 의미가 있더라고요.
바쁜 하루 속에서 뭔가를 천천히 ‘관찰’하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그게 스트레스 해소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심리학적 근거를 들이대는 게 아니라, 그냥 제 경험상 그랬습니다. 뭔가를 꼼꼼히 들여다볼 때, 하루의 잡념들이 잠깐 사라지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 드로잉 취미를 시작할 때, 알아두면 좋은 것들
좋은 점만 이야기하면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제가 겪었던 아쉬운 부분들도 솔직하게 나눠보겠습니다.
- 초반의 ‘못 그린다’ 좌절감은 진짜로 있습니다. 그림일기를 올리는 계정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내 손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보면 생각보다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저는 초반 2~3주 동안 이 감정을 꽤 자주 느꼈어요. 이걸 버티는 게 중요합니다. 줄어들긴 합니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만요.
- SNS에 올리기 시작하면 피로해질 수 있습니다. 저도 한동안 드로잉을 SNS에 올렸는데, 반응이 없으면 괜히 위축되고, 반응이 있으면 그에 맞춰 그리고 싶어지는 이상한 압박이 생기더라고요. 취미가 취미 같지 않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올리고 싶을 때만 올립니다. 기록은 일단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걸 다시 배웠습니다.
- 강의나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보다 보면 오히려 손이 안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잘 그리는 법’을 공부하다 보면 공부만 하고 정작 그리지 않는 날이 생깁니다. 정보를 흡수하는 것과 실제로 손을 움직이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거든요. 저는 “오늘은 공부만 했다”는 날이 며칠 연속으로 이어질 때 의식적으로 스케치북을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 색을 넣기 시작하면 도구 욕심이 생깁니다. 이건 주의하세요. 이게 아쉽다기보다는 일종의 경고인데요, 색연필 하나 사면 더 다양한 색이 필요해지고, 수채화 붓을 하나 사면 또 다른 붓이 필요해집니다. 취미 용품 소비가 생각보다 커질 수 있어요. 저는 처음부터 “지금 가진 것만으로 최대한 해보자”는 원칙을 세운 뒤에 조금씩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게 도움이 됐습니다.
🌸 이런 분들께 특히 드로잉 취미를 추천합니다
드로잉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취미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과 감정을 가진 분이라면, 아마 저처럼 조용히 빠져드실 것 같습니다.
- 하루가 너무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분 — 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오늘 뭘 그릴까’를 고민하면서 하루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무료함을 달래는 데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 글쓰기는 부담스럽지만 일상을 기록하고 싶은 분 — 드로잉과 짧은 한 줄의 조합은, 긴 글을 쓰지 않아도 그날의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림이 글을 대신해주기도 하거든요.
- 퇴근 후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그냥 누워있기엔 찜찜한 분 — 이게 딱 저의 시작 상황이었습니다. 10분짜리 드로잉 하나가 그 찜찜함을 의외로 잘 해결해 줬습니다. 뭔가를 ‘했다’는 기분이 생기거든요.
-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에 막연한 그리움이 있는 분 —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멀어졌다는 분들, 사실 많으시더라고요. 그 감각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드로잉은 그 감각을 다시 깨우는 데 꽤 좋은 도구입니다.
- 비용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취미를 찾는 분 — 운동도 좋고 악기도 좋지만, 초기 비용이 부담될 때가 있죠. 드로잉은 집에 있는 펜과 종이로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 마무리하며 — 그림은 재능 있는 사람만 그리는 게 아닙니다
드로잉 취미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말이 “어머, 그림 잘 그리시는 분이 부럽다”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당황스럽습니다. 저는 지금도 사람 얼굴 못 그리고, 원근감 엉망이고, 비율 이상한 그림을 그립니다. 그래도 매일 그립니다. 그게 제 드로잉입니다.
재능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리고 싶어야 그리는 겁니다. 드로잉 취미의 문턱은 생각보다 훨씬 낮습니다. 오히려 뭔가를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높은 문턱이 됩니다.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사실 문은 이미 열려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닐 생각입니다. 잘 그리는 날도 있고, 오늘처럼 삐뚤삐뚤한 날도 있겠지만, 그 모든 페이지가 제 하루하루를 담고 있으니까요. 훗날 이 스케치북들을 꺼내볼 때, 그 안에 제가 살아온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일입니다.
미술 전공이 아니어도, 재능이 뛰어나지 않아도, 시간이 많지 않아도 — 드로잉은 당신의 취미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서랍 속 볼펜 하나만 꺼내보세요. 그게 시작입니다.